X

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영화스포일러 없이 써보는 간략한 부국제 상영작 후기(시가렛 걸/빌려온 시간/본인 출연 제리/가스퍼의 24시간)
마카로니 23-10-10 12:01 66
0. 부국제에 다녀왔습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막상 후기를 쓰려고 보니 부산까지 다녀와서 영화를 4개밖에 안봤나 싶기도 한데... 보고 싶은 영화는 정말 많았지만 타임테이블을 고려하다 보면 몇 개 못 보게 되더라고요. 어쩌다보니 중화권/인도네시아 영화만 보고 왔는데 이것도 운명인 것 같습니다. 영화 각각의 후기는 물론 따로 쓸 예정이지만 부국제에 출품된 영화는 국내 개봉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여 스포일러 없이 간략히 리뷰를 하려고 합니다.

1. 시가렛 걸
1960년대 인도네시아, 탁월한 재능을 지닌 정향 담배 장인이 업계의 전통에 맞서 사랑과 자아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같은 날 상영하는 영화 중 그나마 흥미있는 시놉시스를 가진 영화가 이것뿐이라 가볍게 골랐는데, 만약 다른 보고 싶던 영화와 시간이 겹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한 상황이라면 좀 슬펐을 것 같아요. 제가 기대한 것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담배 산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형적인 '아가씨와 충직한 돌쇠' 플롯의 로맨스물이었습니다.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미모 더치페이가 잘 됐다는 점에서 즐겁게 보기는 했는데... 인도네시아의 탈을 썼을 뿐 너무나 익숙한 넷플릭스풍 가벼운 로맨스라서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내가 연차 내고 부산까지 가서 보고 싶었던 건 이런 킬링타임 영화가 아니다.... 어째 어정쩡하게 끝난다 싶었는데 원작 도서가 있더라고요? OSMU의 시대 언제 끝나나요 대체?? 저는 소설 원작 컨텐츠가 정말 별로입니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필연적으로 이야기가 붕 뜨는 부분이 꼭 생기는 것 같아요. 할 거면 각색 제대로 해...

2. 빌려온 시간
결혼을 앞둔 막유엔팅은 20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 홍콩으로 떠난다.

감독 정보를 대충 보고 가서 감독이 중국인인지 홍콩인인지, 이게 중국 영화인지 홍콩 영화인지 보는 내내 좀 헷갈렸어요. 영화에서 광동어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짜잔! 감독은 광동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국적을 알게 된 GV 이후에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게 된 영화입니다. 감독이 '중국과 홍콩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중국인이 만든 홍콩에 대한 영화라니까 눈을 세모낳게 뜨고 보게 되더라고요. 아무리 홍콩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깝고 중국의 정체성이 옅은 광동 출신이라지만 중국인이 홍콩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싶었어요. 광동성이 중국 내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의견이 가장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 영화를 정치적인 사안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없어 보였고요. (물론 그런 의지가 있다 해도 본토로 돌아갈 거라면 입을 함부로 털 수 없긴 하겠죠)

그런데 사실 제가 이렇게 비판적인 의견을 고수하게 된 건, 영화만을 두고 생각했을 때 '그래서 중국과 홍콩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대표적인 홍콩 감독인 왕가위의 영화를 생각해보면, '사랑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예전 연인'같은 형태로 홍콩을 은유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플롯으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홍콩 독립보다는 '하나의 중국'에 가까운 영화인 것 같아요. 제 짧은 식견과 우매함의 봉우리 때문에 이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나이브한 중국 영화로밖에 볼 수가 없네요. 한 번 더 보든지 다른 사람들 리뷰를 좀 봐야 이 영화의 스탠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볼 정도로 좋지는 않았어서 좀 곤란합니다...

3. 본인 출연, 제리
대만에서 온 이민자 제리는 은퇴 후 미국 휴양도시 올랜도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남성이다. 어느 날 중국 본토에 있는 비밀경찰에게 전화가 걸려 오고, 제리가 대규모 돈세탁 사건의 용의선상에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번 사건으로 중국으로 송환되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리.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가 거래하는 은행의 사진을 몰래 찍어 보내는 등 전화상으로 중국 비밀경찰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하는데..

보이스피싱에 대한 영화입니다. 보다 열받아서 조금 울었어요. 제발 이 이야기가 픽션이었으면 했는데 실화라지 뭐예요... '가족과 봐도 되는 영화'를 넘어 '부모님에게 강제 시청하게 만들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오프닝과 엔딩의 미국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이 좋았어요. 영화는 실화일지언정,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무리하기보다는 비교적 유쾌하게 영화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더라고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나는 영화입니다. 제목에 끌려서 본 영화이고 이미 영화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어서 새로워질 것 없는 제목 같아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제목이 다시 한 번 와닿아요. 각박하고 교묘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나날이 취약해지는 부모님을 위해 이 영화를 꼭 보여주세요.

4. 가스퍼의 24시간
2032년 인도네시아. 다소 불량한 아마추어 탐정 가스퍼는 정부가 연루된 대량 학살 사건을 수사한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친구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되고 인신매매 악당을 추적한다. 하지만 인공 심박동기가 망가지는 바람에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가스퍼는 아그네스와 킥 등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완결하고자 한다.

부국제에서 본 4편의 영화 중 가장 좋았어요! BGM 사용이 좋더라고요. 까지 쓰고 나니 할 말이 없네요... 호쾌한 액션영화에 가깝습니다. 나름대로 철학적인 물음도 있고요. 중간중간 재치 있는 개그신들이 꽤 재미있었어요. 대사량이 많은 편이고 소설 원작 영화라서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도 많았는데, 자막이 세로쓰기 자막으로 나와서 보는 데 좀 애를 먹었습니다. (한국영화제에서 한글자막 이딴식으로 내보낼거야???)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국제에서 본 네 개의 영화 중 가장 잘 만든 영화 아닌가 싶어요. 영화 각색이 이가 좀 빠졌다는 감상을 받았어서 원작소설이 궁금한데 국내 정발 안 되겠죠....

5. 끝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사실 운명적으로 좋은 영화는 만나지 못했고요, 영화 보고 밥 먹고 영화 보고 밥 먹는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보고 싶었는데 티켓팅 실패한 영화와 보고 싶었는데 시간 안 맞아서 못 본 영화만 트위터에서 알티타는 걸 보니까 영화 픽을 잘못했나 싶어 좀 슬퍼지긴 하는데 뭐 어쩌겠어요. 그치만 전 역시 영화가 좋고 내년에 또 가고 싶긴 해요. 비록 부국제 기간에 숙박비는 바가지고 사람은 쓸데없이 너무 많고 GV 질문은 수준 이하긴 하지만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KIN BY ⓒMonghon
arrow_up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