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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영화지옥만세
마카로니 23-08-17 17:31 109
1. 영업 하지도 말고 받지도 맙시다 (피치 못한 경우 제외)
저는 영업을 당하면 어쩐지 그 작품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지는 청개구리입니다. 그리고 저는 남에게 무언가를 주선하거나 추천한다는 행위가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추천을 한다는 건 저의 취향을 상당히 드러내는 것인데, 상대에게 이상한 취향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늘 있거든요. 제가 받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남에게도 행하지 않겠다는 역지사지의 태도와, 애초에 추천하는 것도 부담스럽다는 마음이 합쳐져 저는 남에게 영업을 절대 하지 않는데요, 이런 철칙을 뚫고 제가 돈 써가며 남에게 예매해줘가면서 애걸복걸 봐달라고 영업한 작품이 딱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미성년이고, 하나는 바로 지옥만세입니다.

뭐가 그렇게까지 저의 심금을 울렸느냐고 설명하면 콕 집어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작품 다 여자 고등학생 두 명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지옥만세 예고편을 보고 저는 단번에 미성년을 떠올렸거든요. 사실상 주연의 구성을 제외하면 둘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그만큼 여성-미성년자 주연 두 명이 이끌어나가는 작품이 적었다는 반증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닐수도.. 제가 식견이 짧았을 수도...)

2. 감독님이 말아주시는 진한 사이비의 맛
옛날에는 줄거리를 다 읽고 스포일러를 아주 자근자근 다 밟은 채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는데, 요새는 예고편도 안 보고 냅다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스포일러는 영화의 감상을 망치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따르게 되었나 싶기도 한데 그냥 귀찮은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대충 다섯줄짜리 시놉시스만 보고 영화관에 가다 보니 영화의 장르를 오해한 채 상영관에 들어가는 일이 최근에 꽤 잦았는데, 지옥만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예고편만 보고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해버렸지 뭐예요? 포스터가 키치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저는 누아르 하트를 모으는 슈가슈가룬 세계관을 상상한 채 갔는데 막상 맞닥뜨린 것은 '사과받을 당사자는 아무래도 좋고 회개하면 신이 용서해주신다'고 굳게 믿는 사이비 종교인이었습니다. 영화 시놉시스를 보고 사이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찐-하고 리얼하게 말아주실 줄은 몰랐어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네요. 저는 종교는 싫지만 사이비종교가 나오는 매체는 좋아하거든요!

사이비를 기대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전체적으로 종교광인 묘사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신기했어요. 일약 화목해보이지만 어쩐지 기묘한 분위기라든지, 만물을 기도로 해결한다든지... 채린 역 배우의 공허하게 맑은 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봉사하고 선한 행동을 보이면 지금까지 저지른 죄는 없는 것이 된다는 듯 행동하는 종교인 그 자체여서 보는 내내 얼마나 갑갑했는지 몰라요. 분명 착하게 굴고 있는데 묘하게 쎄한 느낌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어째서 신예 여성배우 중에는 이리도 인재가 많은 걸까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전도사 역 배우를 어떻게 그렇게 교회 청년부에 하나쯤 있을 법한 인상으로 골라왔는지 신기하더라고요. 동년배들에게는 별볼일없지만, 어른에 환상 있는 여자 고등학생들이라면 혹할 법한 그런 느낌이 딱 나와서 너무 신기했지 뭐예요. 쏭남이한테 요상하게 치근거리는 거 보고 저자식 저거 일 내겠는데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채린이랑 연애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되더라고요(웩).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의 조형을 누가 한 건지, 어떤 자료조사와 자문이 들어간 건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어떻게 이런 그린 듯한 교회남이 등장할 수가...

3. 이 영화에서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은 성인 남성뿐이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 여성의 자살 시도로 시작하지만, 정작 작중에서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은 성인 남성인 전도사뿐입니다. 제가 영업해서 이 영화를 본 친구는 '채린이 아빠도 사업 망해서 자살한 거 아니냐'고 말했는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영화 내에서 채린이가 말하는 건 '엄마'뿐이었던 것 같거든요. 이 추측이 정설이든 아니든간에, 미성년자 여성들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결국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것은 미성년자도 여성도 아닌 성인남성이라는 것이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현실의 남성들이야말로 가장 연약하고 비겁한 존재들이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전 남자가 싫어요.) 현실의 폭력만큼이나 볼품없는 것이 현실의 남성인데, 이런 점을 콕 꼬집어 대놓고 보여주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실을 벗어나 낙원으로의 도피를 꿈꾸는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와 '지옥 만세'를 말하는 두 여성 청소년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릅니다... 처음부터 영화의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영화의 결말에서 잘 지은 제목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서 너무나 좋았어요. 잘 지은 제목은 작품에 대한 최대의 칭찬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4. 한국엔 멋진 여성 배우가 정말로 많다
미성년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세상엔 참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고 한국에는 멋진 여성 배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모든 아름다움은 결국 한 방향으로 귀결된다지만 저는 스크린에서 새로운 얼굴들을 볼 때마다 그 말에 반대하게 돼요.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미인이 많은데 무슨 소리냐?? (루키즘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루키즘 그 자체인 말이군요... 그렇지만 저는 미인이 좋아요. 미안합니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 모두 너무 좋았어요. 저는 화장한 것보다 덜 예쁘게 보이더라도 민낯이 주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런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편 저는 주연들이 정말로 고등학생이거나 20대 초반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쏭남과 황구라 역을 맡으신 배우 두 분은 20대 후반이시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날것의 고등학생의 얼굴과 말투를 할 수 있는 건가요??? 30대가 고등학생 역할을 맡는다는 기사도 종종 나오긴 하지만, 배우란 직업은 참 신비한 것 같습니다.

5. 박수칠 때 떠나지 마시라고요
최근 본 작품들 중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뒷이야기가 이토록 궁금해지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우네 가정 이야기도 궁금하고, 채린이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갈지도 궁금하고, 남은 효천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요. 어떻게 이런 세계를 만들어놓고 엔딩크레딧을 올려버릴 수 있나요? 영화감독들은 정말로 잔인하구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맘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나면 그 감독의 전작들이 궁금해지는 편인데, 지옥만세가 그랬습니다. 영화가 정말 깔끔해요. 학교폭력과 사이비종교라는 고자극 소재를 쓰면서도 자칫 힘들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들은 구태여 상세히 재연하려 하지 않는 섬세함이 보여요. 감독님께 제가 보태드릴 건 많이 없지만 앞으로도 작품활동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이 리뷰를 보시는 분들도 이번 여름 지옥만세 한 번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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