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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영화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nsons
마카로니 23-07-10 14:00 41
1. 옛날에 본 영화긴 하지만
이제와서 리뷰를 쓰는 이유는... 최근에 다시 봤기 때문입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 나서 이 영화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그래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어프 후기에 이 영화를 언급했더니 탐라의 모님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하셔서 헐레벌떡 달려가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선량하고 연약한 트친이 이런 거친 영화를 내 말 한 마디 때문에 보러 가는데 홀로 던져두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어요...

2. 첫인상과 꽤 다른 영화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좀 보기 역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다시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요? 제가 이 영화를 본 게 4년 전이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괜찮아진건지, 그 사이 제가 아리애스터 영화를 보며 단련된 건지, 아니면 은교같은 진또배기 역겨운영화를 경험하고 나니 '넌 존슨즈가족이 쓰냐? 힘든 영화 안 보고 순탄하게 자라서 그래... 은교 겪고 나니까 그냥 잘 만든 영화같다ㅋㅋ' 된건지...

아리애스터는 단편을 참 잘 만드는 감독 같아요. 보어프가 4시간짜리 영화가 될 뻔했던 거나, 미드소마 감독판을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오히려 구구절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들어간 장편인 것 같거든요? 근데 단편을 너무 잘 만들어요. 미드소마도 개인적으로는 감독판보다는 극장판이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다고 느꼈거든요. 통제된 조건 안에서 최적의 결과물을 뽑을 수 있도록 덜어내는 능력이 출중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욕심이 많은데 심지어 잘 버릴 수도 있을 수가... 이래서 석사를 해야 하나 봐요 (논점에서 벗어난 발언)

3. 익숙한 것을 비틀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리애스터는 단편을 참 잘 만들어요. 30분 남짓의 짧은 영화인데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아리애스터의 다른 장편영화들에 비하면 '친족 간 성폭력'이라는 1차원적인 주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니 알기도 쉬워요.

보통 친족 간 성폭력이라고 하면 아버지로부터 딸에게 향하는 성폭력이 가장 흔한 형태잖아요. 만약에 이 영화가 아버지가 딸에게 성폭력을 저지르고, 다른 가족 구성원이 방관하는 이야기였으면 시청자를 분노하게 만들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걸요? 그런데 자식에게서 부모로 향하는 성폭력으로, 이성 간 성폭력에서 동성 간 성폭력으로 두 번 뒤집는 것만으로 엄청나게 임팩트 있는 설정이 돼요. (사실 어떤 성폭력이든 익숙한 문법으로 느껴지면 안 되는 건데 이런 문법이 굳어지게 만든 현대사회가 참 씁쓸하네요)

성폭력의 벡터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간 권력의 구도까지 완전히 역전시킨 것이 이 작품의 포인트인 것 같아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통의 부모가 할 법한 가스라이팅을 줄줄 하거든요. 거기에 데이트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의 가스라이팅까지 함께예요. 진짜 대단한 가스라이팅 대사인데 심지어 분량도 꽤 됩니다. 어떻게 이런 대사를 썼을까요? 모님 말대로 분명 아리애스터는 이런 가스라이팅을 들어봤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리얼한 가스라이팅이...

끝내주는 가스라이팅 때문인지 아버지는 아들을 거스르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사후에나마 아들과 독대하고 아들의 뺨을 때릴 수 있는(!) 강단이 있어요. 아리애스터 영화에서는 항상 여성이 강하거든요? 유전을 이끌어가는 것은 애니와 조앤, 두 여성인데 그에 비해 애니의 남편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불에 타 죽고요, 미드소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이 이용만 당하다 불에 타 죽어요. 심지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아버지가 그냥 남근괴물로만 등장하잖아요. 이게 박찬욱처럼 여성 서사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아리애스터의 마더이슈 영향 아닐까 싶어요. 아리애스터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인터뷰하긴 했지만요. 그 감정이 음의 방향이든 양의 방향이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아주 강렬한 것에 비해 아버지의 비중은 적은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 강단이 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가족 간의 성폭력 문제를 회피해왔는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들기는 하는데, 두려움보다는 정상 가정을 겉으로나마 유지하고 싶은 방관자의 마음인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들을 죽이고 나서 구태여 남편의 피해 사실이 적힌 자서전을 불에 태울 리가 없겠죠?

4. 이건 단편영화니까요
사실 만듦새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인물 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제를 직접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지는 않아도 아들과 분리되는 방법으로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예요. 인쇄한 자서전을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작위적이기는 해도 영화가 진행되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이음새를 견고하게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장편영화를 찍어야만 하는 것 같네요. 최근 본 단편 중 몸값은 장편으로 확장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장편 확장의 가능성이 있거나 없는 것이 단편영화로서 좋은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 스타일의 차이겠죠?

트친분과 이야기 나누다가 아리애스터 영화의 특징이 '황망함'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영화는 비교적 이해가 쉬운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보니 정말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치만 아리애스터가 천재라는 건 이 영화에서도 부정할 수 없네요.

사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어머니와 졸지에 남편이 죽은 며느리의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유전, 미드소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 통틀어봐도 제일 막막한 엔딩이에요. 하지만 등장인물이 처한 미래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갈 데까지 시원하게 가버리는 게 아리애스터의 매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리애스터가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말고 이런 황망한 영화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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