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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영화마에스트로
마카로니 23-08-17 09:31 57
1. 내가 기대한 건 위플래시였구나
이 영화를 보는 날 이른 오후에 문득 메카물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메카물이 왜 좋은지는 도통 모르겠는 거예요. 그냥 심장이 시킨다고 말하기에는, 사실 전 '기계발사!' 같은 게 그렇게까지 재밌진 않거든요. 나는 이 장르의 무엇을 매력이라고 느끼는 걸까 생각하다가, 압도적인 기계문명 앞에서 인간이 극한으로 몰아붙여지는 상황이 오는 게 좋은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쓰고 나니까 많이 다른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도 그런 것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위플래시 같은 거 말이에요.

예고편을 안 본 건 제 잘못이 맞지만, 포스터를 이렇게 말아주면 어느 정도는 위플래시 부자ver.를 기대하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 포스터를 올리기 위해 파일 첨부 개수를 3개로 늘렸습니다. 아래의 두 포스터를 봐주세요.
"전 아버지가 꿈꿨던 아들과는 거리가 멀어요" "네가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쉬웠겠지"
당연히 이 대사들을 보면 휘몰아치는 부자갈등을 기대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사실 메인포스터나 예고편을 봤으면 이런 오해는 안 했을 텐데, 하필 제가 본 게 시놉시스랑, 위의 대사가 나오는 인물별 포스터뿐이더라고요. 아비정전 보고서 극장 때려부순 한국 관객들이 분노한 포인트를 약간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 근데 아무리 포스터에 사기당했다고 할지언정 아비정전같은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어쨌든 제가 기대한 갈등이 휘몰아치는 패밀리이슈 영화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재밌게 봤습니다. 잠 많이 못 자고 저녁 못 먹고 이미 영화 한 편을 본 피곤한 상태에서 본 심야영화라서 보다 자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피곤함도 잊을 만큼 괜찮은 영화였어요.

2. 촉촉한 가족영화를 보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원래 가정적인가요? 물론 서양 어떤 나라든 한국보다는 부모자식관계가 정다울 것 같기는 해요. 잠깐의 갈등을 아름답게 회복하는 그린 듯한 가족영화였는데, 이런 영화를 너무 간만에 봐서 조금 놀랐어요. 메인 포스터랑 예고편을 봤으면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을텐데 말예요. 어쨌든 영화의 부자갈등이 생각보다 깊지 않아서, 제가 평소에 보는 컨텐츠들에 대해 반성하게 됐습니다. 저는 '케빈에 대하여'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같은 가족애라곤 없는 지독한 가족영화 생각하면서 '저러다 죽이나?' '저러다 죽나?' '저러다 음모를 꾸미나?' 이런 생각밖에 안 했거든요. 세상에 그런 가족만 있는 건 아닌데 반성합니다.

사실 영화가 좀 얄팍한 감이 있긴 한데, 화목한 가정의 나이브한 갓반인들은 원래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저냥 적당한 것 같아요. 영화의 시놉시스가 '같은 길을 걷는 부자 간의 상호 질투'를 표방하고 있는 것치고는 딱히 질투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3. 회피형 모음집
사실 이 영화의 주요 갈등은 이해하기가 참 힘들어요. 아들에게 가야 했던 라 스칼라의 지휘자 오퍼가 아버지에게 잘못 간 것부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오퍼를 넣은 당사자가 아들을 불러 '아버지에게 잘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이게 직장인으로서 이해가 안 됐습니다. 전화 잘못 건 사람이 다시 걸어서 정정하면 안 되나요?? 그냥 사과하면 되잖아요. 왜 자기 실수를 남에게 떠넘기죠? 심지어 이 이후로는 아버지가 라 스칼라에 몇 번이고 전화를 거는데도 연결이 되지 않는 장면이 나와요. 프랑스에서는 비즈니스에서 이렇게까지 회피형이어도 되는 건가요?? 이야 유럽 살기 좋다.

어쨌든 남의 실수를 자기가 덮어쓰게 생긴 아들은 한껏 기대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상처주기 싫어 말하는 것을 미루게 돼요. 그걸 두고 영화 내의 등장인물은 아들에게 너는 늘 겁낸다느니 해야 할 말을 회피한다느니 하는 말을 합니다. 아들이 회피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애초에 진짜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있는 원흉이 따로 있어서 미묘했네요.

어쨌든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고, 아들의 집에 찾아가 '너는 거장이었던 나와 수준 높은 관객들이 무섭냐'고 쏘아붙이고 돌아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네 엄마는 예전에 바람을 피웠었다' 같은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나이먹고 중년의 아들한테 상처주고 싶어서 '너는 사실 내 친자식이 아니다'라고 비밀을 폭로하는 건가? 싶었는데 또 친아들은 맞대요. 그럼 이 얘기는 왜 나온거지? 싶었어요. 어쨌든 아버지가 아들을 쏘아붙이는 동안 아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회피형 그 자체의 묘사였어요. 근데 아버지는 집에 가서 이 일방적인 소통을 '대화를 하고 왔다'고 표현하더라고요??? 회피형이 입 꾹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죠? 프랑스는 원래 회피형의 나라인 건가요? 이상하네...

4.이것이 프랑스 영화...?
약간 수위 있고 이상한 얘기를 하면 꼭 '프랑스 영화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유한 게 미안할 정도로 멀쩡한 영화인 것 같기도 하고, 감정선을 생각하면 좀 '프랑스 영화'인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요.

초반에 '이거 프랑스 영화다'라고 느낀 지점은 연인 간의 성관계가 아주 담백하게 나타나는 장면이었어요. 딱히 섹슈얼한 묘사가 있지는 않았고 키스하다가 다음날 아침으로 넘어가서 성관계를 했다는 암시만 주는 정도였는데, 성관계를 비일상적인 포르노가 아니라 그냥 지극히 평범한 일상처럼 끼워넣었다는 점이 신기했어요. 관객한테 섹스어필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연인 간에 할 일 했다는 느낌?

그리고 서양권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하던데, 이 영화에서 그런 사례를 보게 되어 신기했습니다. 주인공의 부모님이 50년째 동거만 한 설정이더라고요? 백발 노인이 되어서야 프로포즈를 하지 뭐예요. 이후에 나올 아버지의 실망과 대조시키기 위해 영화적으로 조금 과장해 넣은 설정인지, 원래 흔한 일인지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아들은 이혼한 전처와 친밀하게 지내며 비즈니스를 함께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사회의 모습이면 참 쿨하고 좋은 것 같아요.

어째 또 후기 쓰다보니까 좋다고 해놓고 '개연성이 이게 뭐냐'고 욕하게 된 느낌이네요... 그렇지만 재밌었습니다. 작위적일지언정 행복한 엔딩은 좋은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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