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영화바비
마카로니 23-07-27 15:25 73
1. 한국의 기사증후군 어쩌면 좋은가
바비를 봤습니다. 개봉 전에 바비월드 세트장을 보고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저는 관객석에 사람 5명 이상 앉아있을 것 같은 영화는 영 구미가 안 당기거든요. 바비를 비롯한 장난감에도 영화 보러 갈 만큼 큰 관심은 없어요. 포스터가 접힌 채로 영화관에 걸리는 일만 없었어도 안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쯤되면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아닐까요? 하도 난리가 났길래 내심 기대하고 갔는데... 아니 켄도 챙겨주잖아! 이 정도면 이퀄리즘 아냐?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켄을 레몬과 함께 모래사장에 파묻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마당에 무슨...

2.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바비 리뷰
첫 번째 단락을 써놓고 바비 리뷰를 계속 미뤄왔습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밀수를 보고 온 지금 더 이상 미루면 영원히 안 쓰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습니다. 사실 본 직후에는 '너무 인류애 넘치는 이퀄리즘 영화 아냐?' 싶었는데 그 사이 좋은 리뷰를 몇 개 보고 생각이 바뀌었으므로 좀 더 나은 감상평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3. 바비 걸 인 더 바비 월드
장난감을 갖고 놀았던 여자아이라면 이 영화의 도입부를 사랑하지 않기도 어렵지 않을까요? 저만 다 크고도 구체관절인형이나 실바니안 패밀리 같은 거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아름다운 바비 월드 세트를 보시라고요... 그레타 거윅이 세트장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백 번 이해되더라고요. 빈 잔으로 음료를 마시는 시늉을 하는 식으로, 인형놀이의 비현실성이 드러나는 장면들도 너무 좋았어요. 그치만 역시 최고는 이상한 바비 아닐까요? '왠지 모르게 늘 다리를 찢고 있음' 같은 설정이 들어 있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이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던 뭇 남성들은 바비가 한국에서 잘 안 된 이유를 '한국은 바비 문화권이 아니라서'라고들 하던데(참나!), 꼭 바비가 아니어도 비슷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면 분명 공감할 만한 심상이었어요.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바비인형을 가지고 뭐 얼마나 심오한 영화를 만들겠나, 해봐야 애들 보는 디즈니 만화영화같은 거 나오겠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엄마가 될 연습이나 하라는 듯 아기 인형만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자 어린이들을 비춰주더라고요. 시작부터 이거 진짜 페미니즘 영화구나!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사실 '바비'라는 단어는 여자들이 결코 닿을 수 없지만 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회적 이상향이잖아요. 아쿠아의 바비걸에서는 '네 맘대로 옷을 벗기고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현실의 여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개념은 아닌데, 매일매일 행복한 바비 월드의 예쁘고 날씬한 티피컬 바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이런 함의를 콕 집어준 게 좋았네요.

현실 세계로 가는 부분부터는 사실 약간 전형적이라고 느끼기는 했는데요, 그래도 여자 얘기라면 좋은데 어떡하나요! 좋은 것만 가득하던 바비 월드에서 가부장제와 성희롱이 판치는 현실 세계로 떨어지고, 바비 월드가 켄부장제에 물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현실 세계의 여성으로서 좋지는 않았지만, 충격요법으로는 최고였다고 생각해요. 이걸 보고도 여남이 평등하며 성차별같은 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 죽는 게 나을텐데...

4. 켄 얘기도 하긴 해야겠지
라이언 고슬링의 비중이 생각보다 큰데, 자아를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부분이 열받아서 때리고 싶었어요. 라이언 고슬링은 어디서 이런 티피컬-하남자를 연구해온 걸까요? 여자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찌질거리는 것도 가부장제에 심취해서 자기가 뭐 된 줄 아는 것도 하나같이 열받고 짜증나요. 얄밉고 우습게 조형된 캐릭터인데 진정으로 이 캐릭터에 감명받아 '영화 이름을 켄으로 바꿔도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성별들은 대체 뭘까요... 죽어...

켄들이 싸우는 장면에선 찰리 XCX의 Boys 뮤비가 생각났어요. 그 장면이나 이 뮤비나 여성들이 자주 입는 사탕껍질같은 옷과 작위적 섹스어필을 남자들에게 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별 거 아니긴 한데, 백인남성 라이언 고슬링을 제치고 동양인 남성인 시무 리우가 비교적 알파메일로 등장한 게 재밌더라고요. PC함을 위한 걸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동양인 입장에서는 기분이 꽤 괜찮을지도요.

5. 고작 바비로 기 죽을 거면 그냥 죽는 걸 추천드림
영화는 좋았고 재미있었는데 리뷰를 지금까지 미뤄온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해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였습니다. 갑자기 바비가 인간이 된다니, 만물이 인간이 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적인 엔딩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좋은 리뷰를 봐서 영화의 제작의도에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리뷰를 쓸 힘이 생겼습니다. 구구절절 좋은 리뷰지만 그 말을 그대로 옮겨봐야 의미는 없는 것 같고, 덧글로 따로 링크를 붙여둘게요. (하이퍼링크를 본문에 넣으면 게시글 목록이 깨지더라고요)

사실 바비는 페미니즘, 가부장제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할 뿐 상당히 온건한 영화잖아요. 그리고 저는 바비 월드의 켄들이 2등시민 취급 당하는 것도 현실 세계의 여자들에 비하면 제법 온건한 대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것도 못 견뎌서 바비가 그토록 미운 남자들은 대체 뭘까요?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를 사랑하라고 만든 영화지 남자를 싫어하라고 만든 영화는 아닌 것 같긴 한데 전 원래 남자가 싫어서요… 그리고 그들에겐 잠깐의 블랙코미디지만 여자들한텐 아마도 평생 이어질 현실이잖아요. 현실의 남성들을 겪어온 여성들이 바비의 켄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과, 남성들이 바비를 보고 2등시민 취급 당해 불쾌한 것은 달리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몰라 그냥 죽어

한편 이 리뷰를 쓰기 전날 밀수를 보고 왔는데, 확실히 바비는 밀수 이후에 보면 조금은 싱겁게 느껴지는 영화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켄들이 저렇게 재수없게 구는데, 아무리 현실 세계의 여성을 상징한다고 해도 픽션에서조차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줘야 한다니 너무나 다정한 영화예요… 지위는 비슷할지언정 여자들은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어….
SKIN BY ⓒMonghon
arrow_up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