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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게시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음 주의

스포일러 안 가림 다른 작품 얘기도 막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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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no. 7  엘리멘탈

1. 참 재미있었다 재미있었다... 그 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고 잘 만들었는데 저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아마 저에겐 쿠소영화인 것 같습니다...) 아리애스터 영화에 9000자나 써놓고 이런말하기 뭐하지만 저는 작품 볼 때 보통 생각 많이 안 하고 1차원적으로 받아들이거든요. 엘리멘탈은 크게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적당히 산뜻한 영화라는 뜻 아닐까요? 2. 사실 저만의 의지로 볼 장르의 영화는 아니지만 사실 저는 영화관에 사람 5명 이상 찰 것 같은 영화는 자의로 잘 안 보거든요. 비주류가 되길 원해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런 영화는 귀신같이 마음이 잘 안 가요. 나중에 기회 되면 보겠지만 굳이 영화관 가서 볼 정도는 아닌 미적지근한 감정만을 갖게 되네요. (영화표가 14000원씩 하는 시대가 아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텐데요) 마침 메가박스 3000원 쿠폰이 탐라에 떠돌아다니고 보어프는 적당한 상영시간이 없던 참에 탐라의 모님이 재미있었다고 후기 남겨주신 덕에 거의 끝물에 보게 됐네요. (저 세 우연 중 하나라도 안 겹쳤으면 굳이 볼 생각 안 했을듯...) 그래도 가끔은 이런 마음이 따뜻해지는 얘기도 봐줘야하는 것 같아요. 어른이 보기에는 좀 나이브하고 유치한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이잖아요. 그리고 사랑과 해피엔딩이란 언제나 좋은 거 아닌가요? 3. 어떤 의미에서든 가볍다! 이민자 및 인종차별에 대한 비유가 처음부터 꽤 직접적으로 나온다 싶었는데, 중반부 이후로는 은근슬쩍 흐려지더라고요. 메인 주제가 인종차별 타파가 아니니까 당연한 거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약간 싱거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야심차게 만든 세계관이 적용되다 만 기분이잖아요. 물론 그런 스탠스를 끝까지 이어가면 피로해지기도 하고, 완급조절이 필요하니 일부러 덜어낸 것이겠지만요. 모님의 좋은 감상 덕에 호기심이 생긴/원래 볼 생각 없었던/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중간에 프로메어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요, 프로메어에서는 버니시 차별의 톤을 균일하게 가져가서 좀 더 세계관에 대한 몰입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도 엘리멘탈에서 그려진 차별이 좀 더 현실에 맞닿아 있다 보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백인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좀 있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그건 그렇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불 원소들에 비하면 웨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 탄탄대로라 지나치게 나이브한 백인남성 그 자체였는데 처음에는 단점도 좀 있나 싶다가 결국 앰버를 사랑으로 감싸안아주는 완벽한 남자로 그려져서 그건 좀 별로네요. 세상에 그런남자가어딨어; 너도 아시안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무르게 못살아!! 미소지니의 시대에 픽사는 되도않는 왕자님 주입을 그만둬라! 물론 제작자들이 1세계백인남성에 대한 무언가를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우리에게 주입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지는 않았겠죠. 근데 이민자-여성이라는 2중으로 약자인 포지션에 있는 앰버는 지금과는 달라져야 하는 미완의 존재인데, 그걸 완성시켜주는 건 웨이드지만 웨이드 스스로는 그냥 계속 웨이드라는 점이 역시 아니꼬워요.... 웨이드 스스로는 앰버를 만나 많이 달라졌다고 얘기하지만 극의 주인공이 앰버이니만큼 웨이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니 뭐가 달라진 건지는 안 와닿아서 더 그런건지도요. 그리고 이건 진짜 너무 영화에 이입 못 한 생각이긴 하지만... 가게 내팽겨치고 나가지 마!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일반 시민한테 대충 떠넘기지 마! 애초에 관공서에 그런 식으로 처들어가지 마! 냅다 애인한테 일가족 전체를 소개시키지 마! 이런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좀 들었어요. 저는 어른인가봅니다... 4. 좋은생각... 좋은생각... 볼 때는 꽤 만족스러웠는데 쓰다보니까 또 아쉬웠던 얘기만 잔뜩 하게 되네요. 그치만 좋았어요. 정말이에요... 좋았던 것들 좀 써봐야겠어요. 일단 가장 뇌리에 콱 박힌 건 역시 비비스테리아를 보러 가는 장면! 비비스테리아 신의 감정선도 화면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게일이 앰버와 웨이드의 데이트를 도와주러 온 것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포인트였고요. 개인적으로는 꽃이 가득 피어나는 화면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면서도... 픽사의 기술력을 있는 힘껏 과시하는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너네 애니메이션 끝내주게 잘 만든다! 윈드볼 보러 가서 웨이드가 냅다 응원을 시작하는 장면도 좋았어요.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게 솔직하고 긍정적인 양기 캐릭터 현실에서 정말 드물잖아요. 있더라도 주변에서까지 늘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웨이드의 응원에 다들 반응해 함께 응원하고, 파도를 타고, 그 응원이 결국은 선수에게까지 가서 닿는 흐름이 정말 좋았어요. 이거야말로 현대사회에 필요한 다정 아닐까요? 이 장면에서 대립하던 앰버와 게일이 스포츠를 통해 마음을 열게 되는 것까지 정말 완벽해요. 원래 존재하던 관용어구나 인간 신체의 특징을 원소들의 성질에 맞춰 변형한 것도 정말 좋았어요. 특히나 클로드 겨드랑이에서 꽃이 자라는 장면 보고 정말 재치있다고 생각했지 뭐예요. 웨이드가 자기 몸을 볼록렌즈처럼 만들어서 불을 붙이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발상을! 과학이 감성을 위해 사용되는 건 정말 항상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앰버 가족의 이민자 스토리도 좋았어요. 특히나 아시안 여성이라면 이입할 포인트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희생이라는 주제가 부모님과 앰버, 앰버와 부모님을 넘어 웨이드와 앰버로까지 확장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뻘한데... 디즈니 작품에서는 늘 '희생할 용기'를 내면 살게 되는 것 같아요. 필사즉생 행생즉사 그 자체인듯... 공기 중으로 증발한 수증기가 다시 물로 돌아오는 엔딩은 꽤 예상할 만한 전개였지만, 그래도 아무도 죽지 않는 해피엔딩은 참 좋죠! 이전에 나온 '크라잉 게임'이 이 장면의 키포인트로 등장할 줄은 몰랐는데 이 구조도 좋았어요. 5. 영화 외적인 딴생각 후반부에 웨이드가 은퇴식에 난입해서 "우리가 만나지 않을 이유가 아주 많이 생각났어"라고 말하잖아요. 근데 그 다음에 대는 이유가 '너는 불이고 난 물이야' 외에는 생각나는 거 하나도 없고 그냥 지금 어떻게든 지어내고 있는 느낌이라 너무 웃겼어요. 그래 너 순정남이다... 진짜 헤어지기 싫구나... 근데 그렇게 할 말 없으면 그냥 다른 말로 시작하지 그랬어(ㅋㅋ) 한편 엔딩크레딧이 진-짜 길더라고요. 최근 본 영화 중에 제일 긴 것 같아요. 역시 픽사... 크레딧에 지나가는 제품들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중간에 Kolgate 치약을 발견하고 패러디라는 걸 눈치채서 굉장히 유쾌하다고 생각했어요. 엄청나게 많이 지나가던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해냈나 싶더라고요. 한편 영화 내에서도 영어권 생활자라면 좀 더 잘 와닿았을 언어유희가 꽤 있었어서 이 영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영어 사용자들이 부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초반에 나오는 단편이 좋았네요. 리트리버 짱. 6. 저도 나름 보면서 울었거든요 저도 나름 제작자가 '울어!!!!!!!'하는 구간에서는 '네!!!!!!!!!'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MBTI F신 모님 후기 보고왔더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정말 T인 것 같아요. 별로 울지도 않았는데 잘 보고 나와서는 아쉬운 점 얘기만 잔뜩 하고 있네요. 다음 학기에 있을 합평에 대비해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연습을 좀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저는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이것까지 쓰고 리뷰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너진 앰버 가족의 가게와 파이어타운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파졌어요. 복구는 무슨 돈으로 했나...
만화

no. 6  강가의 이수

1. 뭐 이런 개막장이 다 있어 사실 별로 할 말은 없는데요... 21세기 우후죽순 쏟아져나오는 상업BL의 모든 문제가 여기 집약되어 있는 것 같아서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왜 이 웹툰을 덜컥 소장으로 사버렸을까요? 아 열받아 아 내 돈 갠홈에서 만화 리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억울해서 여기서라도 취향존중 안 하는 나쁜말 해야겠습니다. 불호 후기입니다.... 2. 진심으로 이런 게 좋으세요?? 누굴 탓하겠습니까... 대충 트위터 영업만 보고 냅다 전권 구매 한 제가 잘못이지... 그런데 이런 작품을 양지로 끌어올려서 영업하는 사람도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런 작품을 거짓말로 먹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들어 음지에서만 있어야 할 취향이 아무렇지 않게 양지에 떡하니 놓여 있는 광경을 자주 보는데 이거 진짜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 본 작품 중 '밀랍인형학원폭렬가'가 꽤 수위가 높은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 본 소설에는 신체와 관련된 저속한 표현이 다수 등장하며 강도 높은 폭력, 욕설, 합의되지 않은 관계, 혐오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으니 미리보기를 꼭 확인 후 구매 바랍니다.) 이런 경고 넣어주거든요?? 그리고 작중에서 확실히 '합의되지 않은 위력에 의한 성관계'라는 표현을 해 줘서 그렇게까지 역하지는 않아요. 근데 강가의 이수는 뭐야?? 강가의 이수도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에 대한 경고 정도는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등장인물이 강간을 강간이라고 생각 안 한다고 해서 강간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니지요????? 차라리 아예 합의하지 않은/강압적인 성관계를 노린 거면 저도 최고로 잘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게 픽션에서는 맛있는 포인트가 되는 거 저도 알아요. 근데 이런 성관계를 자연스러운 관계 발전의 과정인 척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심지어 딱히 로맨스도 아니고.. 차라리 파트너가 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것 같아요. 근데 그 과정도 진짜 하나도 마음이 안 동해요. 꾸금을 위해 모럴을 버렸으면 야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어느 방면에서나 설득력이 없어서 그냥 불쾌한 저만 남습니다. 전체적으로 남자가 만든 남성향 BL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당사자성 없는 제가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제 퀴어 당사자인 남자 작가들이 그린 퀴어 웹툰의 느낌이 납니다. 제가 뭐라고 말을 많이 얹지는 못하겠는데 어쨌든 여성향의 모럴과 남성향의 모럴은 다른 궤도에 있다는 감상이에요. 아 모르겠다 그냥 빻았어요. 그냥 빻았고 깊이감도 뭣도 없는 그냥 꾸금만을 위한 빻남성향이에요!!!!!!!! 3. 중년도 중년 나름이지 이 웹툰 영업하는 트윗에서 제가 혹했던 셀링포인트는 '리얼한 가부장 중년 타입'이 코믹하게 등장한다는 것이었는데요... 리얼해도 너무 리얼해요. 내가 픽션적 가부장 보고싶댔지 누가 진짜 쌍도남 달랬어?? 탐라에 중년 좋아하시는 분 많지만 이런 중년까지 드실 분은 거의 없을걸요?? 얼굴은 다르지만 그런 남자는 현관문 열고 나가면 길바닥에 널렸잖아요 ㅅㅂ 진짜 욕을 빼고 글을 쓸 수가 없다 주인수 입을 빌려서 외관은 혹한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기는 하는데 그냥 너무 리얼한 쌍도남이라 어디서 매력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어요... 픽션이면 미화가 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없고 그냥 우리네 아버지(negative) 그자체입니다. 한녀가 이런 타입 등장인물한테 매력 착즙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중간중간 웃긴 포인트가 없진 않은데... 이젠 그런 개그포인트도 그냥 저질 남성향으로 느껴져요. 세상엔 산뜻하고 더 웃긴 작품도 더 많습니다. 당신의 돈과 시간과 뇌 용량을 아끼세요. 4. 대한민국 상업비엘의 미래가 존나게 어둡다 보통 원작 소설이 있는 각색 웹툰의 전개가 아쉬우면 '각색하느라 내용을 쳐내서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생각하는 편인데요, 이건 그냥 원작부터 글러먹은 것 같아요. 이 전개는 스토리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세계인 게 틀림없어요. 소설판 리뷰를 좀 훑어봤는데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야나 레드오션이 되면 비슷한 양상을 보이겠지만, 웹툰과 웹소설이 돈이 되는 산업이 된 시점부터 깊이감 없는 뽕빨물이 범람하는 것 같아요. 제가 BL밖에 안 봐서 BL에 한정해 얘기하겠지만, 다른 장르라고 딱히 사정이 다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웹소설 강의를 들을 때 웹소설에서는 유행하는 소재를 잘 조합해서 트렌드에 맞추되 자신만의 요소를 하나 넣어서 색다르게 만드는 것이 흥행에 중요한 요소라는 내용을 들었거든요. 물론 그 교수님만의 견해일 수도 있지만 상업비엘 작품의 양상을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필연적으로 명작 1개에 아류작이 100개쯤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류작이 다 '나만의 무엇'을 넣겠답시고 무리수를 두는.... 하.... 아류든 아니든 연재 작품을 꾸금으로 팔아먹으려면 씬도 적당히 나와줘야 하겠고요. 요새 컨텐츠는 빌드업을 오래 하기 힘드니 초반에 일단 일을 쳐야 하는데 당연히 첫만남에 성관계를 할 당위성이 별로 없으니 원나잇이나 합의 없는 성관계 둘 중 하나로 시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두 사례가 아니면, 현실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가볍게 한 번 해 버리고 마는 거고요. 보통 이런 식으로 꾸금을 보기 위한 꾸금이 되면 뽕빨물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이런 얄팍한 개연성을 가진 작품들이 그냥 뽕빨물이라는 장르로 존재하면 괜찮은데, 요새 컨텐츠는 거의 다 이런 식이라 작품을 고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피곤합니다. 뽕빨물을 좋아하는 거랑 세상 모든 작품이 뽕빨물이어도 괜찮은 건 한참 다른 얘기잖아요. 이유야 어쨌든 글을 쓰겠다고 문학 관련 학과에 입학했으니 올해 들어서는 리디에서 이런저런 작품들을 스터디의 일환으로 접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 나름 골라 읽고 있는데도 잡는 작품의 대부분이 개연성이 아쉬워서 슬슬 김이 새는 참이었거든요. 강가의 이수가 그런 실망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이건 뭐 '이게 의자구나' 하는 이세계물도 아니고... 여자가 좋아하는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쓴 남자'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강가의 이수 등장인물들이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윤리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고찰했으면 좋겠고요. 개인이 이런 이야기를 쓰는 건 별개지만 역시 영업트윗을 타고 양지로 나오면 안 되는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총평입니다. 쓰다 보니 리디에서 뽕빨물이 아닌 개연성 있는 명작을 추구하는 제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네요...
영화

no. 5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nsons

1. 옛날에 본 영화긴 하지만 이제와서 리뷰를 쓰는 이유는... 최근에 다시 봤기 때문입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 나서 이 영화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그래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어프 후기에 이 영화를 언급했더니 탐라의 모님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하셔서 헐레벌떡 달려가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선량하고 연약한 트친이 이런 거친 영화를 내 말 한 마디 때문에 보러 가는데 홀로 던져두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어요... 2. 첫인상과 꽤 다른 영화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좀 보기 역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다시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요? 제가 이 영화를 본 게 4년 전이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괜찮아진건지, 그 사이 제가 아리애스터 영화를 보며 단련된 건지, 아니면 은교같은 진또배기 역겨운영화를 경험하고 나니 '넌 존슨즈가족이 쓰냐? 힘든 영화 안 보고 순탄하게 자라서 그래... 은교 겪고 나니까 그냥 잘 만든 영화같다ㅋㅋ' 된건지... 아리애스터는 단편을 참 잘 만드는 감독 같아요. 보어프가 4시간짜리 영화가 될 뻔했던 거나, 미드소마 감독판을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오히려 구구절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들어간 장편인 것 같거든요? 근데 단편을 너무 잘 만들어요. 미드소마도 개인적으로는 감독판보다는 극장판이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다고 느꼈거든요. 통제된 조건 안에서 최적의 결과물을 뽑을 수 있도록 덜어내는 능력이 출중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욕심이 많은데 심지어 잘 버릴 수도 있을 수가... 이래서 석사를 해야 하나 봐요 (논점에서 벗어난 발언) 3. 익숙한 것을 비틀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리애스터는 단편을 참 잘 만들어요. 30분 남짓의 짧은 영화인데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아리애스터의 다른 장편영화들에 비하면 '친족 간 성폭력'이라는 1차원적인 주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니 알기도 쉬워요. 보통 친족 간 성폭력이라고 하면 아버지로부터 딸에게 향하는 성폭력이 가장 흔한 형태잖아요. 만약에 이 영화가 아버지가 딸에게 성폭력을 저지르고, 다른 가족 구성원이 방관하는 이야기였으면 시청자를 분노하게 만들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걸요? 그런데 자식에게서 부모로 향하는 성폭력으로, 이성 간 성폭력에서 동성 간 성폭력으로 두 번 뒤집는 것만으로 엄청나게 임팩트 있는 설정이 돼요. (사실 어떤 성폭력이든 익숙한 문법으로 느껴지면 안 되는 건데 이런 문법이 굳어지게 만든 현대사회가 참 씁쓸하네요) 성폭력의 벡터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간 권력의 구도까지 완전히 역전시킨 것이 이 작품의 포인트인 것 같아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통의 부모가 할 법한 가스라이팅을 줄줄 하거든요. 거기에 데이트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의 가스라이팅까지 함께예요. 진짜 대단한 가스라이팅 대사인데 심지어 분량도 꽤 됩니다. 어떻게 이런 대사를 썼을까요? 모님 말대로 분명 아리애스터는 이런 가스라이팅을 들어봤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리얼한 가스라이팅이... 끝내주는 가스라이팅 때문인지 아버지는 아들을 거스르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사후에나마 아들과 독대하고 아들의 뺨을 때릴 수 있는(!) 강단이 있어요. 아리애스터 영화에서는 항상 여성이 강하거든요? 유전을 이끌어가는 것은 애니와 조앤, 두 여성인데 그에 비해 애니의 남편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불에 타 죽고요, 미드소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이 이용만 당하다 불에 타 죽어요. 심지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아버지가 그냥 남근괴물로만 등장하잖아요. 이게 박찬욱처럼 여성 서사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아리애스터의 마더이슈 영향 아닐까 싶어요. 아리애스터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인터뷰하긴 했지만요. 그 감정이 음의 방향이든 양의 방향이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아주 강렬한 것에 비해 아버지의 비중은 적은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 강단이 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가족 간의 성폭력 문제를 회피해왔는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들기는 하는데, 두려움보다는 정상 가정을 겉으로나마 유지하고 싶은 방관자의 마음인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들을 죽이고 나서 구태여 남편의 피해 사실이 적힌 자서전을 불에 태울 리가 없겠죠? 4. 이건 단편영화니까요 사실 만듦새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인물 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제를 직접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지는 않아도 아들과 분리되는 방법으로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예요. 인쇄한 자서전을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작위적이기는 해도 영화가 진행되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이음새를 견고하게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장편영화를 찍어야만 하는 것 같네요. 최근 본 단편 중 몸값은 장편으로 확장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장편 확장의 가능성이 있거나 없는 것이 단편영화로서 좋은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 스타일의 차이겠죠? 트친분과 이야기 나누다가 아리애스터 영화의 특징이 '황망함'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영화는 비교적 이해가 쉬운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보니 정말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치만 아리애스터가 천재라는 건 이 영화에서도 부정할 수 없네요. 사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어머니와 졸지에 남편이 죽은 며느리의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유전, 미드소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 통틀어봐도 제일 막막한 엔딩이에요. 하지만 등장인물이 처한 미래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갈 데까지 시원하게 가버리는 게 아리애스터의 매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리애스터가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말고 이런 황망한 영화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영화

no. 4  몸 값

1. 이 영화를 보고 속이 안좋아졌습니다 봐야지 봐야지 미루다 BEAU 본 김에 오늘을 단편영화의 점심으로 정하고 내친김에 봤습니다. 그리고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속이 안 좋아졌어요. 저도 어디 가서 하남자 롤플 못한다는 소리 듣는 사람 아닌데 너무너무 토종 남자가 나와서 몇 번 멈추고 봤네요... 이렇게 리얼한 토종 하남자 대본은 또 간만에 보는 것 같아요. 최근에 본 한국 작품 중엔 남자사용설명서 남자주인공이 제법 하남자긴 한데 결이 달라요. 남사설의 하남자가 '어우~ 뭐야~' 싶은 조롱의 대상이라면 몸값의 하남자는 그냥 상종도 하기 싫은 역겨운 남자입니다. 이렇게까지 고증이 잘 된 하이퍼-리얼리즘-하남자를 보면 대본을 어떤 성별이 썼는지 늘 궁금해하는 편인데, 이렇게까지 토종 남자가 잘 묘사된 대본은 오히려 남자가 썼다고 하면 놀라워지는 것 같아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추함을 이렇게까지 가감없이 세상에 내보낼 수 있다니? 대단한 객관성이에요. 저는 객관성이야말로 남자가 가지기 힘든 특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네 저 남자 싫어해요 다들 아시죠?) 근데 사실 결말을 보면 '나 같은 남자'는 '그런 남자'와는 다르다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2. 홍상수로 시작해 박찬욱으로 끝났다 라는 리뷰를 봤는데...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옹그쌍쑤 영화 한 편도 본 적 없지만 대충 뜬구름잡는 개저라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박찬욱같다는 얘기는 여자가 남자를 단죄함+약간 잔인하고 기괴함 두 속성 때문에 나온 것 같고요. 저것만으로 박찬욱이 튀어나오다니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부정할 수도 없군요... 사실 '반전이 놀랍다' 류의 리뷰를 너무 봐서 그런가 오히려 신선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요. '이 제목 이 내용에 반전이 있으면 이런 얘기겠지' 상상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래도 반전이 시작되는 후반부의 화면 연출은 좋았다네요. 멋진 롱테이크였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미장센을 좋아해서 즐겁게 봤습니다. 영화 자체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별점은 짜게 줬습니다. (영화 자체 만듦새는 단편영화 중에서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요,저의 왓챠 별점 기준은 '비슷한 작품 보고 싶냐'이므로...) 저는 죽어도 싼 등장인물이 단순하게 배드 엔딩을 맞는 얘기는 그다지 재미있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얄팍한 인간이 그냥 다른 범죄에 휘말릴 뿐인 게 뭐가 좋나 싶어요. 21세기의 '참교육' 정서인 것 같기도 하고요. 여튼 이건 사이다도 뭣도 아니다! 뭐... 단편영화니만큼 사건의 층위를 단순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겠지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앞뒤로 다른 이야기들이 붙으면 그 또한 사족일 것 같긴 해요. 더할 것도 없고 덜 것도 없는 꽉 닫힌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3. 후속작은 안 봐도 될듯 영화가 잘 됐는지, 후속작이 두 종류나 있더라고요? 드라마랑, 드라마 기반 영화... 그런데 갑자기 재난물을 버무려서?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을 극한상황에 몰아넣고 생존하게 하는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 오징어게임 생각도 나네요. 시놉시스를 봐도 화별 줄거리를 봐도 원안에서 너무 멀리 간 것 같아요. 안 봐도 괜찮을듯...
영화

no. 3  BEAU

1.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면 보가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개봉 후 인터뷰에서 아리애스터가 단편 BEAU와 보어프는 큰 관련이 없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궁금해서 봤습니다. 트위터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그만했으면 좋겠을 땐 안 멈추다가 설명이 필요해졌을 때 영화를 끝내고 나를 내쫓아버림"이라는 취지의 트윗을 봤는데... 그 평에도 동의하지만, 저를 진정으로 내쫓는건 이 단편입니다. https://archive.org/details/ari-aster-short-films/Beau.mp4 BEAU는 저작권 때문에 유튜브에서는 다 내려간 것 같습니다. 위의 링크에서 감상하실 수 있고요, 자막은 없지만 자막 없다고 못 볼 수준은 아닙니다. 대사가 많지 않거든요. 그리고 보 이즈 어프레이드 보셨으면 소리 꺼놔도 대충 무슨 말 하는지 유추하실 수 있을 거예요. 2. 제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리애스터는 제목 짓는 센스가 좋은 것 같아요. 미드소마는 몰라도 유전은 정말 좋은 제목 아닌가요? 짧은 제목으로 작품의 주제를 확실히 드러낸다는 느낌이에요. BEAU는 제목이 BEAU로 알려져 있지만, 오프닝을 보면 아마 아리애스터가 의도한 제목은 'BEAU can not, will not, should not SLEEP'인 것 같아요. 멋진 제목입니다... 아니 그리고 이건 보어프 얘기지만... Beau is가 boys와 같은 발음인 건 노린 건 아니라던데 정말 질투나는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설명해줬으면 해 확실히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단편이라는 감상이긴 한데, 아리애스터가 왜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큰 관련이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상황은 같을지언정 인물 설정이 완전히 달라서 다른 이야기가 돼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자폐인과 연관지어 해석한 리뷰를 인상깊게 봤는데, 적어도 이 단편에서는 보라는 인물에 자폐라는 설정을 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당연하겠죠) 앞의 5분은 알고 있던 이야기의 원본이라 매끄럽게 넘어가는데, 마지막 1분은 대체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문법으로 이해하면 마지막 1분의 50초 분량은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근데 정말 마지막 엔딩 시퀀스 10초가 저를 끝없는 의문으로 밀어넣어요... 아니 이게 대체 뭐야????????? 6분짜리 단편에 해설을 요구할 수도 없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저는 어쩌면 좋은가요... 이 단편에 비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친절하게 떠먹여주는 수준입니다. 아니 아리애스터 씨는 뭐 어쩌다 이런 영화를 찍으셨어요?? 개인적으로는 단편영화(라기보다는 독립영화라고 표현해야 맞겠지만요)는 어쩔 수 없이 직설적이고 깊이가 얕다는 감상이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리애스터가 짧은 영화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쑤셔넣는 건지 그냥 아리애스터의 생각이 범상치 않아서 깊어 보이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른 단편들도 궁금한데 엄두가 안납니다....
영화

no. 2  보 이즈 어프레이드

1. 아리애스터라는 인간... 저는 아리애스터 영화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감독 3명을 꼽으라면 늘 박찬욱, 왕가위, 그리고 아리애스터를 꼽아요. 그렇지만 박찬욱/왕가위와 아리애스터는 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뭐가 다르냐면, 박찬욱과 왕가위 영화에서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드러나는데, 아리애스터의 영화에서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집요함이 보여요. 그리고 아리애스터가 집요하게 그려내는 '싫어하는 것'은 제가 싫어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기 때문에 저는 아리애스터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아리애스터가 싫어하는 게 뭐냐면요... 가족(혈연적 의미의 가족 이외에도 가족으로 비유되는 공동체 포함),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남성), 그리고 종교입니다. 제 생각이긴 한데 아마 모두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 같아요. 아리애스터가 가족공동체 싫어하는 거 누가 몰라요... 그만큼 아리애스터의 불호는 강렬합니다. 아리애스터 영화는 두 편 정도만 봐도 '이 사람 대충 이런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그림이 그려지는데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그 생각에 쐐기를 박습니다. 타인의 삶을 너무 속속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아리애스터는 꼭 자신의 인생을 낱낱이 나열한 자서전을 꼭 내주면 좋겠어요. 어떤 삶을 살아야 이런 영화를 만드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다... 2. 진짜 집요하고 지독한 인간 왜 영화감독을 비롯한 창작자들에 대한 평가 보면 "자가복제가 심하다" 같은 말 꼭 나오잖아요. 근데 사실 김치찌개집에서는 김치찌개만 끓이는 거지 뭐 어떡하나요. 어떤 창작자든간에 지향하는 인생의 방향이라든지 하고 싶은 이야기 같은 건 항상 같은 틀 안에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위에서 아리애스터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 집요하다고 말했는데, 아리애스터는 자기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바깥에서 관측하고,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요. 그리고 그 자기가 잘 알고 싫어하는 것들을 아주 집요하고 자세하게 구현하는 데 아주아주 공을 들인다는 게 느껴집니다. 존슨즈 가족의 비밀, 유전, 미드소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 모두 다... 영화 초반 1시간쯤 등장하는 장소의 디테일이 말도 안 되게 엄청난데, 이게 통째로 세트라고 하더라고요. 미술팀이 이거 만들다 미치려고 했다는데 백번 이해합니다. 세트에 한정한 이야기였겠지만 아리애스터는 기본적으로 디테일에 미친듯이. 창작물에 필요한 고증 그 이상으로. 매우매우 집착하는 사람이에요. 아리애스터가 이토록 집착적으로 그려내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도 가족 공동체에 대한 반발인 것 같습니다. 일단 아리애스터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정말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잘 알겠어요. 유전자나 가족처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고 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 게 아주아주 잘 보입니다. 그런데 또 완전히 싫어하는 건 아니고요, 누구나 그렇듯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미디어에 나오는 화목하고 이상적인 정상가정을 갖고 싶은 로망이 있는데, 동시에 그런 게 존재할 수는 없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스스로 선택한 가족이나 대안가족에 대해서 긍정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아리애스터 영화에서 가족에서 벗어나 새롭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늘 사이비종교로 그려지거든요.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일단은 사이비 종교 집단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데, 대신 그에 준하는 공동체가 나옵니다. 그 중 하나는 종교와 무관하지도 않아요) 사이비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가족에게서 분리하고 종교 공동체에 헌신하도록 하는지 알면 사실 이렇게 학을 떼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 생각엔 아리애스터 가정 혹은 가까운 주위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아요. 아니라기엔 너무 자주 나와요. 어쨌든 아리애스터는 인간이 가족 내에서도 밖에서도 안정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모두 도피일 뿐이고, 도피니까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억지로 뭉치려고 해 봤자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생각이 너무너무너무너무 잘 보여요. 저도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정도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아리애스터 인생관 괜찮아? ㅠㅠ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 저라는 사람의 바닥을 너무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한데.............. 아리애스터의 네거티브한 생각들은 대체로 제가 원래 하고 있던 생각과도 맞닿아 있어요. (저도 가족 싫어하고 종교 싫어하고 섹스 싫어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혈연관계란 무엇이길래 피가 섞이지 않았으면 친구도 안 했을 것 같은 너무 다르고 잘 안 맞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뭉쳐 살며 계속 함께하고 싶어하고 사랑을 갈구하는가 오래 생각해왔는데요... 아리애스터도 저랑 똑같은 생각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기분이 별로예요. 3. 보는 무섭고 나는 불안하다 개인적 얘기 그만하고 싶은데 아리애스터 영화를 어떻게 개인적 경험과 분리해서 얘기합니까? 어떤 영화가 안 그렇겠냐만은, 아리애스터 영화는 특히나 살아온 인생에 따라 해석과 호불호가 극히 나뉘는 영화인데요... (미드소마를 힐링영화로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는 것만 봐도... 아리애스터 영화는 특히나 보는 사람을 타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개인적 얘기 할거예요. 안 궁금하시면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시길... 옛날에 MMPI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 검사에서 저는 예기불안 수치가 100점으로 나왔습니다. 만점이에요. 저는 100명을 모아놓고 사서 걱정하는 순으로 줄 세우면 맨 앞에 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기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면서 신경계를 지속적으로 긴장되도록 몰아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저는 거의 모든 일을 접할 때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나쁜 방향의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요. MBTI에서 S와 N 구별법으로 생뚱맞은 상상하기, 이상한 문장 채우기 이런 거 많이 하잖아요. 저는 '내 기타가 젤리가 되었다'라는 비현실적인 문장이 주어지면 '뭐라는거야?' 라고밖에 반응을 못하는 S인데요.... 현실적인 방면이라면 제 상상의 나래는 무궁무진합니다. 저는 정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고 늘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살아요. 당연히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그냥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혼자 사람 의심하다 인류애를 잃고, 쓸데없이 걱정하느라 진이 빠진 사람이 됩니다. 너무너무 피곤한 성격이지만 제가 이런 사람인 걸 어떡하나요..... 장황하게 제 예기불안에 대한 얘기를 한 이유는...... 이 영화는 예기불안의 시각화같은 영화라서입니다. 제 생각엔 아리애스터도 저 검사 하면 예기불안 만점 나올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흐름을 만들 수가 없어요. 그냥 진짜 무슨 영화가 '이런 일 일어나면 어쩌지'의 '이런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기분이에요. 현실과 맞닿아 있고 아예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라 더 불안해집니다. 첫 1시간 정도는 계속 이런 흐름인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다가 도망가고 싶었어요. 불안해서... 너무너무 불안하고 불편해서... 제가 이렇게도 몹시 불안함을 느낀 이유는 보가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도 MMPI 검사하면 예기불안 100점 나올거야. 이 영화 초반 1시간쯤은 보의 불안의 이유를 보여주려는 듯이 화면과 사운드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여러 상황과 소리가 겹치는 장면이 많은데, 그 모든 것들이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소리를 지른다든지 싸운다든지, 뭐가 됐든 내내 산만하고 시끄럽고 불안합니다. 어떻게 이런 연출을 이렇게 길게 내보낼 생각을 했을까 경탄스러울 정도예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로 안 할텐데.... 저에게는 '경제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늙었을 때 나는 내쫓기지 않을 내 집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처럼 편안한 장소에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 있는 걸까? 나는 어디서 어떻게 노인의 삶을 살게 될까?' 이런 종류의 자본주의적 두려움이 있어요. 돈이 없으면 집을 가지지 못하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거나, 쾌적하지 못한 집에 살아야만 할텐데 그건 저에게 큰 공포입니다. 영화 내에서도 주거지에 대한 불안이 꽤 큰 비중을 두고 다뤄지기 때문에 아리애스터도 비슷한 두려움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검색해봤더니 아파트 퇴거 전날에 생각한 것을 토대로 만든 시나리오라네요) 4. 아리애스터는 영화 천재가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잘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긍정적인 방향의 질투를 느끼는 편인데요, 이 영화는 질투가 좀 날 뻔하다가도 영화가 저를 압도해서 그런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여야 '나도 저런 거 만들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그리고 아리애스터는 석사 학위가 있더라고요? 대학원을 가야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래요) 트위터에 대충 쓴 후기도 그렇고 이 후기도 그렇고 어쩐지 모아보니까 불호 후기 같은데 제 감상은 굳이 따지면 호에 가깝습니다. 좋았어요. 잘 만든 영화고요. 아리애스터 영화는 미장센이 정말 좋거든요. 저는 공포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건 화면이 예쁜 공포영화를 별로 못 봤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예쁜데 무섭기 쉽지 않죠... 저는 차라리 사상이 못생기면 다 보고 욕을 하는데 그냥 영화가 못생기면 보기 싫어요. (곡성이 무섭진 않았는데 화면의 못생김을 참을 수 없어 꺼버린 사람) 역시 제가 아리애스터를 좋아하는 건 일단 예쁘게 찍는 감독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쨌든 좋은 연출들이 꽤 많았는데 최대한 스포일러 안 되는 선에서 기억나는 것만 좀 써보려고 해요. 다시 보고 좀 자세히 쓰고 싶은데 다시 안 보고 싶어요... 근데 나중에 다시 보고 싶긴 해.... 진짜 제 마음은 뭘까요? 오프닝 시퀀스가 진짜 욕 나올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무섭고 충격적이고 뭐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냥 창작물적으로 엄청나요. 일단 그런 장면을 오프닝으로 넣은 것 자체가 참신하기도 하고요, 짧은 시퀀스로 보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불안하고 회피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는지 강렬하게 알 수 있어요. 이런 연출을 쓴 사람이 아리애스터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효과적으로 쓴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해요. 오프닝 시퀀스는 제가 아묻따 붐따 누르는 소재가 메인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이 시퀀스는 이 소재가 아니면 안 돼...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상상도 못 했는데 오프닝과 엔딩이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루더라고요. 아리애스터... 미친 인간(positive) 아리애스터가 '관객이 루저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었다'고 하던데 사실 제가 루저의 기분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보면 제가 루저가 되나요? 어떻게요?) 근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것 같아요. 아리애스터 영화에서는 공통적으로 남자가 좀 찌질합니다. (유전의 아버지는 찌질하진 않지만, 그는 맞는 말을 하는데도 발언이 유의미하게 주인공한테 닿지 못하고 결국 죽잖아요) 그리고 여자는 남자보다 주체적이고 강한 존재로 나와요. 이토준지의 토미에가 누나를 모델로 한 거랑 비슷한 결인 것 같아요. 대충 내가 무서워하는 걸 너희도 느껴보라는 의도 아니었을까요? 여튼 보의 어머니는 두려운 존재지만 아름답습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니 너무 좋고 정말 매력적이에요. 예고편에도 잠깐 나오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회전하는 무드등 불빛이 부분적으로 어머니 얼굴을 비추다 어두워지는 것을 반복하는 장면이 꽤 길게 있거든요. 그 시퀀스 정말 좋았어요. 작중 배경이 2022년이고 보가 1975년생이던데, 그걸 감안하면 어머니가 엄청나게 젊습니다.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이 젊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의미 아니려나요? 그리고 아리애스터 진짜 남성의 성적 욕망. 남성기. 섹스하고 싶어하는 남성. 밑도 끝도 없는 미드식 섹스 전개. 이런 거 진짜 싫어하는 것 같아요. 중간에 이해 못한 남성기 관련 메타포가 둘쯤 있는데 이거 진짜 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뭘 좀 불순하게 만지는 장면이 나와서 'ㅎㅎ;; 내가 이상한거인듯;'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리뷰 검색해보니까 그거 남성기 만지는 은유가 맞는 것 같아요. 근데 왜 들어간 건지 잘 모르겠음... 여튼 아리애스터가 남성기를 좋아해서 넣은 장면은 아니란 게 확실해보입니다. (1900년대 후반 한국남성 문학처럼) 성적 행위를 통한 자아의 발현 내지는 해방 같은 걸 얘기하고 싶은 것 같지도 않은데... 아리애스터한테 남성기란? 영화 내에서 '앞의 빌드업으로 미루어보아 다음에 이런 장면 나오겠네..' 같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 몇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애스터는 그 생각을 깨부수고 저를 진짜 황당하게 만듭니다. 이 사람 미친 사람 아냐? 스포일러라 쓰지는 않겠지만 진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 싶고..... 사실 반전도 여러 번 반복되면 클리셰가 되는 법이라 완전히 새로운 반전은 점점 만들기 힘들어지는 법인데, 아리애스터는 실존하는 클리셰로 예상하기 힘든 반전을 주되 흐름을 깨지 않는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리고 '어라 이거 아까 나온 그건가?' 싶은.. 메타포가 조금씩 변조되서 반복해 등장하는 연출이 꽤 있었는데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근데 최근에 강조하고 싶은 걸 너무 직설적으로 변조 없이 반복하는 영화를 몇 편 봐서 그런가 굉장히 세련됐다고 느꼈어요.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건 확실합니다. 벽에 쓰인 낙서라든지 간판명이라든지... 배경으로 밀도 높은 텍스트가 꽤 지나가는데 누가 나중에 캡쳐해주면 좋겠어요. 내용이 궁금해요. 그리고... 엔딩 크레딧 정말 좋았어요. 요즘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이런 식으로 많이 연출하는 듯. 저 이런 엔딩 크레딧 정말 좋아합니다. 5. 제가 감히 이 영화에 점수를 매겨도 되는 걸까요 평점이 아직도 고민이 됩니다. 일단 4점과 5점 사이인 건 확실한데... 왓챠 추천 알고리즘이 딱히 훌륭하지는 않지만, 저는 최근 들어 왓챠에서는 '비슷한 작품을 추천받고 싶은가'를 척도로 별점을 매기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비슷한 영화가 있기는 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쉽사리 별점을 못 주겠네요. 비슷한 영화가 없을 것 같은데 진짜 비슷한 영화를 추천해주면 그건 그것대로 무서울 것 같습니다... 쉽사리 볼 용기가 들지 않을듯 트위터에 검색해보니까 영화 불호평이 대체로 '주제가 없다' '그냥 이어붙여놓는다고 영화가 아니다' 이런 식이더라고요? 주제나 스토리가 없다는 평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왜 그런 평이 나오는지 이해합니다. 이 영화가 트라우마 재생기 또는 정신병 체험 그 자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 영화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거 꿈이지? 상상이지? 싶은 장면이 진짜 많은데....(너무 대놓고 현실 아닌 장면 제외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부분이 없어요. 꿈에서 깬다거나,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이런 식으로 상상임을 일깨워주는 장면이 없어요. 다 현실이에요. 이게 말이 되나고요. 이런 게 현실이면 안 되잖아... 현실일 수도 없잖아....... 근데 뭐... 아리애스터가 이 영화의 장르를 나이트메어 코미디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영화 보기 전에는 그래서 나이트메어 코미디가 뭔데? 싶었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진짜로 악몽입니다. 현실 기반인데 애매하게 발이 땅에서 떨어진 비현실적인 부분이 은근슬쩍 현실인 척 하며 끼어 있어요. 원래 꿈에서는 비논리적인 전개도 대충 논리적인 것처럼 매끄럽게 넘어가잖아요. 깨고 나서야 그거 말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정말 악몽 같습니다. 그럼 코미디는 어디 갔냐고요? 글쎄요... 어이없어서 나오는 헛웃음도 웃음이죠... 진짜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 6시쯤에 밖에서 뭘 때려부수는 소리에 깼고요 (바로 앞 상가가 리모델링하는 것 같더라고요) 유용한 정보와 격언을 띄워주고는 하는 회사 엘리베이터에서는 이런 사자성어가 나오더군요: 방촌이란(마음가짐이 이미 혼란스러워졌다는 뜻으로,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운동도 안 했는데 어쩐지 온몸이 쑤셔요 저는 이게 다 아리애스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no. 1  슬립: 차원이 다른 그녀의 원나잇

1. 최강의 어그로 최근 싸이바-대학에 다니면서 자아실현을 위한 예술과 금전가치 창출을 위한 예술은 아주 다른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른바 '순문학'과 '장르소설(또는 웹소설)'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지금까지 들은 강의의 사례로만 보자면) 순문학계에서도, 장르소설계에서도 순문학과 장르소설은 아예 다른 분야라고 못박아둔 것 같습니다. 지면의 크기와 연재 방식의 차이가 글이 쓰여지는 방식까지 바꾼다고 하더라고요. 각설하고, 웹소설의 핵심은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화가 짧으면 한 권의 첫 장을 펼치는 것보다 심리적 장벽이 낮지만, 그만큼 독자가 이탈하기도 쉽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즉 현대 미디어의 핵심은 어그로인 거죠. 드라마 보고 이 얘기를 왜 꺼내냐면, 이 드라마에는 웹소설을 잘 팔기 위해 갖춰야 할 요소가 다 들어 있다는 감상을 내내 받았기 때문입니다. 총 7화짜리 드라마인데, 매 화가 끝나기 5분 전에 엄청난 떡밥이 뿌려지는 탓에 첫 날 4화를 몰아서 봤어요.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기 때문에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슬립: 차원이 다른 그녀의 원나잇'이고요, 포스터의 캐치프레이즈는 무려 '내 XX가 웜홀인 것 같아' 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어그로인가요... 어그로가 현대 컨텐츠의 덕목이라고 한다면, 이 드라마야말로 지극히 현대적인 작품입니다. 진짜로.. 2. 서양인에게 오리엔탈 컬쳐란 무엇이길래 작품에서 잘 와닿게 표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스키마로 추정하건대 이 드라마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는 '완전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니, 현재를 사랑하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 내에서 불교에 관한 메타포가 굉장히 잦게 등장하는데, 불교의 교리와도 일맥상통하는 메세지인 것 같아요. 참 좋은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첫 문장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작품은 말하고 싶었던 주제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사용된 메타포와, 드라마의 전개가 조화롭게 맞물리지 못하고 모두 따로 놀아요. 서양인이 만든 매체라는 특성까지 합쳐져서, 제작자가 최근에 불교를 접하고 *신비로운 아시안 컬쳐*에 대한 환상으로 끼워넣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고 제가 동양인이라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맞습니다) 그리고 이 불교적 교리에 힘을 실어주듯 주인공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며 주변 사람들을 은근히 괴롭게 한다'는 묘사가 주변인물들의 입을 빌려 두어 번쯤 나오는데, 앞에서 쌓은 빌드업이 없으니 드라마가 그렇게 흘러가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지금 리뷰 쓰면서 생각한 건데, 사실 이 작품에서는 불교를 빼도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3. 극본의 불가항력 저는 장르에는 클리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창작물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성적일 수는 없지요. 그러면 픽션은 진행이 안 됩니다. 공포영화 주인공은 호기심 때문에 위험한 장소를 들쑤시다 무서운 존재를 맞닥뜨려야만 하는 것처럼요. #장르를_시작도_못하게_해보자 같은 해시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그런데 클리셰의 배치도 정도껏 해야 장르문법으로 넘어가지,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 너무너무 답답합니다. 대화를 하는데 거의 모든 대화가 사람만 둘일 뿐 단방향으로 흐르다 끝나버려서 갈등 해소가 안 돼요. 대화만 하면 해결되는데 왜 대화를 안 나누냔 말이에요.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얼키고설켜서 상황이 꼬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쉬운 방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를 악화시키는 전개가 매번 이어지니 매우 답답합니다. (얼마 전 원피스 실사영화화에 대한 트윗에서, 사람은 2D로 그려진 만화보다 실존 인물이 연기하는 작품에서 심리적 거리감이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더 견딜 수 없어한다는 내용을 봤는데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게다가 제목처럼 주인공이 XX를 통해 (하...) 평행우주를 넘나드는 설정인데, 주인공의 상황 판단력이 너무나 떨어져요. 평행우주로 떨어진 걸 알면서 왜 원래 세계의 자신에 집착하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상한 시선만 받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하냐구요... 그러니까 평소에 이세계물도 좀 보고 그래야지 머글들이란 아이고 답답해 4. 미국에게 섹스란...? (사실 안 궁금함) 제목과 캐치프레이즈에서 주인공의 섹스라이프를 보게 되겠다는 예상은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불필요하게 여자 벗은 몸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배우가 감독이라 할 말이 없네요. 감독이 시켜서 벗은 것보단 자의로 벗은 게 낫죠.... 자의로 벗었다고 해서 설마 배우가 싸이바-노출증-환자라서 벗었겠습니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은 배우일 뿐이겠죠. 그런데 대체 누가 '벗을 때는 벗어야 진정한 배우다' 같은 명제를 만들었냐고요. 심지어 딱히 벗어야 할 때가 아닐 때도 벗어요. 대체 왜?? 제가 본 투 비 아시안 유교걸이라 과민반응하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별 거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데 섹스에 개방적인 것이 쿨한 것이라는 백래시가 뒤덮은 미국의 성문화를 생각하면 배우의 의사와 감정에 상관없이 이 또한 거대한 여혐이라고 봅니다.......... 5. 결론: 뱀의 머리에 지렁이의 꼬리 초반부를 생각하면 사실 만듦새가 나쁜 작품은 아닙니다. 신선한 연출도 제법 있고, 호흡을 딱 한 화 분량으로 짧게 가져가면서 다음 화를 보게 하는 능력이 출중해요. 소재가 자극적이니 킬링타임용으로도 괜찮고요. 그런데 이게 끝입니다. 신선한 연출이라고 해도 같은 포맷으로 반복해 등장하니 진부해지고, 표현하고 싶은 건 많은데 얄팍하게 드러내기만 한 느낌이에요. 처음부터 가벼운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봤기에 기대가 크지도 않았는데, 초장에 힘을 다 써버리고 끝으로 갈수록 매력이 떨어집니다. 심지어 전개가 너무 뻔해서 중반쯤 보면 '지렁이 꼬리로 끝나겠구나...' 하는 예상이 됩니다. 이걸 끝까지 본 건 뒷 내용이 기대돼서가 아니라 어쨌든 별로였다는 얘기를 하려면 끝까지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모든 완결된 상태로 세상에 나온 창작물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소재도 연출도 너무 게으르지 않았나 싶어요. 보면서 에에올 생각이 정말 많이 났는데 정말 그런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이런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아류라고밖에는 못 부를 것 같습니다. 제작자의 노고와 초반의 신선함을 생각하면 1~2점정도는 주고싶은데 왓챠가 비슷한 작품 추천해줄까봐 무서워서 0.5점 줬어요. 역시 저는 쿠소일 거면 애매하게 철학 담으려 하지 말고 욕망에 충실하게 쿠소인 편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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