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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다머Discover the endless new with fast fashion
마카로니 24-06-27 23:10 39
근무하던 카페에서 갓 잔에 채운 아이스커피 한 잔을 흠뻑 엎지른 무화과는 좋아하던 셔츠를 못 쓰게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무화과가 리어다머에게 섭섭함을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옅게 수심이 낀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리어다머는 섬세한 연인을 위해 세탁세제, 세탁용 솔, 베이킹소다와 구연산, 과산화수소 그리고 뜨거운 물 따위와 저녁 내내 씨름했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보았으나 하얗던 셔츠를 이전처럼 희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무화과는 부모가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믿는 어린아이같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비누거품을 손에 묻히고 있던 리어다머를 곁에서 지켜봤다. 리어다머의 시도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리어다머가 무화과를 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화과는 이미 기분이 나아졌고 그늘 없이 미소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리어다머도 무화과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진 것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리어다머는 연인의 상심한 얼굴을 보았던 것이 자기 셔츠를 못쓰게 된 것보다 괴로웠다. 한 번 뛰어든 이상 이제는 무화과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리어다머는  내심 이 기회에 아름다운 연인에게 새 셔츠를 선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리어다머는 오랫동안 젖어 있던 손을 무화과가 가져온 보송보송한 수건과 그 바깥의 손에 포개며 주말에 시가지로 데이트를 나가 의류 매장에 함께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무화과 씨에게 잘 어울릴 셔츠를 파는 곳을 알아요. 무화과는 수건으로 부드럽게 리어다머의 손을 닦아 주며, 리어다머가 데이트 신청을 할 때 늘 그랬듯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로 리어다머는 주말을 기다리며 새 셔츠를 입은 무화과를 즐겁게 상상했다. 카탈로그를 볼 때마다 저런 디자인을 감당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의아했던 셔츠들이 분명 무화과에게는 근사하게 어울릴 것 같았다.

리어다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무화과는 어깨부터 가슴까지 손바닥보다 큰 자수가 수놓아진 린넨 셔츠, 도통 용도를 알 수 없는 술 달린 끈이 아래로 늘어뜨려진 셔츠, 원단 중간중간 비즈가 줄줄이 붙은 셔츠 따위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것들은 오로지 무화과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처럼 보였다. 이거 아무도 못 입을 것 같은데요? 무화과 씨만 입을 수 있는 옷을 기성품으로 만들다니 전지구적 손해예요. 리어다머는 활짝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하려다 말고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무화과가 아름다울수록 리어다머는 무화과가 샘을 떠나 발붙인 리어다머의 세계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동시에 실감한다. 전 인류가 입고도 남을 옷을 매주 만들어내고 또 그만큼의 옷을 사막에 내다 버리는 산업의 중심에 무화과를 데려오다니, 이보다 무신경할 수는 없다. 그런 옷을 걸쳐보게 한 것만으로도 무화과를 충분히 모욕한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무화과의 손을 잡고 유리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리어다머와의 데이트를 즐거워하고 있는 무화과의 기분을 순식간에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리어다머? 무화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변한 리어다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리어다머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지금 당장은 뒤집힐 여지 없이 명백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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