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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로기어린 책을 위한 의자는 없다
마카로니 23-07-11 23:29 65
파영은 자신의 토지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닿는 옥상에서 머리가 자기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어린이들과 종종 놀아주곤 했다. 파영은 그 작은 생명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아이들은 파영의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영이 떠맡게 된 것은 파영의 눈을 마주치고 파영의 토지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던 책이다. 그 책이 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인지 잊었다고 해도 파영이 그를 사랑할 일은 없을 것이다. 파영이 사랑했던 어린아이들은 모두 자랐다. 그 아이들은 이제 파영의 세계가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 속에 산다. 파영 옆에 남은 어린아이라고는 하나도 자라지 않은 채 품이 큰 옷소매 안에서 작은 손가락을 내미는 어린 책뿐이다. 파영은 이제 어린애라면 지긋지긋하다.

사람은 불에 잘 타지 않는다. 종이는 작은 불에도 잘 탄다. 파영은 파영의 유일하고 영원한 어린아이가 둘 중 하나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슌이 고작 담뱃불 하나에 망가지는 존재라면 슌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금보다는 덜 끔찍하게 느껴질 것 같다. 파영은 파영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좁고 해가 잘 들지 않고 천장이 낮은 방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다. 슌이 그 방의 한구석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슌은 파영이 그동안 사랑했던 것들을 모조리 잃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파영의 애정까지 바라고 있다. 파영은 그 바람에 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러나 파영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뿐이다. 파영은 슌이 그린 자신의 그림에 피우던 담배를 지져 껐다. 슌이 그린 파영은 불타 사라져 있다. 파영은 고개를 돌리고 생각한다. 이토록 손쉽게 네 세계에서 내가 지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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