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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다머The deity in jeans
마카로니 23-09-21 00:48 72


무화과가 흰 셔츠 아래에 연한 색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을 때 리어다머는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온 걸까?

연애는 할 만큼 한 것 같고 이 정도면 나름대로 잘 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공식과 주기를 따라가는 역할놀이일 뿐인 연애가 조금은 지겹다고, 한창 좋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센티멘탈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리어다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내뱉은 뒤에야 생각했다. 하지만 청바지를 입은 무화과 앞에서는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변해버린다.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며 멋쩍게 웃는 무화과를 보면 리어다머는 성급하게도 그 단어의 정의를 무화과에게 바치고 싶어진다.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쐐기 박기라는데 어느 타이밍에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좋은데 무화과 씨는 아닐까? 고백을 받는 건 익숙하고, 거절하는 것은 더더욱 익숙한데 하는 법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리어다머는 고백을 거절하며 늘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화과가 -리어다머가 이전에 그랬듯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리어다머는 그들의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슬퍼질지도 모른다. 그 때의 미안함까지 기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리어다머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가와 관계없이 무화과는 근사했다. 리어다머는 무화과 앞에서 심장이 뛰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리어다머의 상상력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점점 입안에 고인 말을 참기가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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