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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로기Cinema Is Never Screened Twice
마카로니 23-06-22 21:26 73
환혹관의 스크린에는 늘 흑백영화가 흐르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파영같다. 그 때의 파영은 그저 검고 더러 흰 사람이 아니었고, 파영이 보고 있는 것들 또한 그랬다. 그러나 그 때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와 상관없이 파영이 볼 수 있는 것은 회색조 필터가 씌워진 기억뿐이다. 파영은 뒷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필름이 감기는 소리를 들으며 다른 이들이 마주보고 있는 스크린은 어떤 색일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흑백영화는 어둡다. 파영은 검은 그림자 안에서 뭉개진 형상들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인상을 쓰고 노려봐야만 했다. 사람의 얼굴, 다발로 묶인 꽃, 색 있는 종이 위에 쓰여진 편지 같은 것들은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 한 덩어리처럼 보일 뿐이다. 그 중 선명한 것은 오로지 파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뿐이다. 회색의 손가락 안에 흰색 담배, 회색 필터와 검은색 재, 하얀색 연기. 그것들이 입술 안으로 숨겨지고, 불타 떨어지고,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파영은 생각한다.

어째서 불은 흰색인가.

불과 흰색과 검은색과 공백은 같은 말이기 때문인가. 그 때의 파영은 불이 결국 공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성냥에 불을 붙였을까. 검은색 머리카락은 파영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파영은 스크린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표정에서도 의중을 읽을 수 없다. 그는 옆에 앉은 어린아이에게 지금 막 불을 붙인 담배를 물려 주고 있다. 그러고 나서는 미미하게 웃는다. 파영은 정말로, 미소짓는 입가 위의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크린 안의 파영이 스크린 밖의 파영을 마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영사기의 불빛이 꺼지고 나서, 같은 기억이 다시 재생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파영은 생각한다. 자리에 앉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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