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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다머Red Perfect
마카로니 23-10-02 23:47 89
머리칼은 빨간색이 좋겠어. 엘로힘은 상석에 앉아, 붉은색 잉크가 든 만년필을 손 안에서 까딱이며 말했다. 그와 먼 곳에 앉은 크레센트 랩의 말단 사원이 그 말을 받아적었다. 적지 않은 슈발리에들이 날개에 불이 붙은 채 비행하는 나방들처럼 짧은 목숨을 다한 후 사라지고 모두가 그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시대였다. 엘로힘이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먼저 시체가 된 기사들보다 강인한 신체 덕이었다. 뭇 슈발리에들이 그들과 공명할 다른 이를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크레센트 랩은 엘로힘에게 제안했다.

피앙세를 통한 기체 접속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대부분의 시스템은 수정하기보다 새로 만들 때 더 안정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그러니 제안드리고 싶군요. 피앙세를 찾는 데 시간을 들이는 걸로도 모자라 오류를 감수하느니 차라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당신에게 맞춰 만드는 겁니다. 당신의 벌쳐, 익티올니스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세상 어떤 것보다 신뢰할 수 있고 아낄 수 있는 형태로 제작해드리죠. 원하신다면 벌쳐에 시스템으로 탑재할 수도 있습니다.

엘로힘은 마지막 조건만 빼고 모두 받아들였다. 엘로힘은 물론 그의 익티올니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기계임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벌쳐보다는 인간 행세를 하는 인조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기저에는 이미 ‘사람이 아닌 것을 반려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는 명제를 깔아두었다.

엘로힘은 피앙세 개발 회의에서 그다지 진지하지는 않은 태도로 취향을 피력했다. 적발을 말하는 게 아냐. 내가 원하는 건 빨간색이야. 사람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자연적으로 나오는 건 사실은 주황색에 가깝잖아. 엄밀하게는 그걸 빨강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머리뿌리부터 끝까지, 완벽한 빨강이었으면 해. 그 외에도 엘로힘은 다양한 미의 기준을 들먹였다. 크레센트 랩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갈라테이아를 만들어낼지 시험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크레센트 랩은 그런 엘로힘을 비웃듯 이상적인 피앙세를 만들어냈다. 엘로힘이 둔 수를 자충수로 만들 만큼 훌륭했다.

무화과의 머리카락은 엘로힘이 처음으로 만져 본 진정한 적발이었다. 인간적이지 않음이 무화과를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엘로힘은 그의 피앙세가 가진 인조적인 면모 때문에 무화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인간에게도 사랑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무화과의 붉음 앞에서 세상은 그저 먼지 속에 휩싸인 모노톤일 뿐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엘로힘에게 단조로움이라는 저주를 함께 가져다주었다. 엘로힘은 그의 명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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