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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비가미여기 메뉴판 좀 주시겠어요
마카로니 24-03-04 23:17 56
테라다 사미다레는 패밀리 레스토랑 4인석의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타는 속을 오렌지 주스로 축였다. 사미다레는 집안을 풍비박산낸 아빠의 애인을 소개받는 자리에 흔쾌히 나가겠다고 할 정도로 테라다 코우지라는 인간이 얼마나 구제불능인지에 대해 달관해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아무리 봐도 자기 또래인 예쁜 애를 데리고 왔을 때 사미다레는 생각했다. 애인 아들인가? 이 나이쯤 되는 자식한테 굳이 이혼 후 만나는 애인을 소개해준다면 대부분은 재혼을 염두에 둔 것이니 그럴듯한 추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우지는 사미다레의 맞은편에 그 예쁜 애와 나란히 앉은 채, 더 올 사람은 없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을 폭탄처럼 던졌다. 이쪽은 내 애인. 이름은 우시오 엔이고, 너랑 동갑이야.

...뭐?

사미다레는 자기도 모르게 코우지의 말끝을 밟듯 급히 따져 물었다. 언제부터? 코우지는 손으로 숫자를 꼽아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1년 좀 넘었나? 우리 둘 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데. 그러더니 옆에 앉은 어린 애인을 돌아보며 웃었다. 눈 앞의 두 사람이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그치―'라고 말하며 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꼴을 보는 사미다레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년 넘었으면 이혼하기도 전이잖아. 아들과 동갑인 애인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만 줄줄 이어진다. 분명 슬퍼야 할 것 같은데, 겪은 바가 있어서 이제는 화도 안 난다. 미리미리 부모 속을 썩여놔야 평생이 편하다던데, 그건 역의 경우에도 성립하는 이야기인가보다. 사미다레는 눈앞의 불륜 커플을 타박하는 대신, 남이 계산해주는 기회가 있을 때 자주 올 일 없는 패밀리레스토랑의 비싼 메뉴나 잔뜩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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