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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비가미이름 없는 손가락의 이름난 주인
마카로니 24-02-18 23:55 42
유서 깊은 가문의 저명함을 세습하는 것은 일단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운을 가지기만 한다면 한없이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름 몇 자만으로 알려지는 것은 그렇지 않다. 외려 가문의 그림자에 가려지지나 않으면 본전치기이니 결론적으로는 힘있는 가문에 태어나는 것은 고만고만한 뜨내기들에게야 좋은 일이지만 용이 되고 싶은 자들에게는 개천에서 태어나는 것만 못하다. 세토우치 지로는 어떠냐 물으면, 그 스스로는 아마도 이무기쯤은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기 힘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로는 세토우치라는 성 없이도 스스로 유명해졌다. 그것은 지로의 무명지 덕이다. 얼굴과 이름은 모르더라도 아래로 늘어뜨린 손을 보면 적어도 같은 닌자들은 대부분 지로를 알아봤다. 그들은 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채 세토우치 지로가 어떤 닌자인지에 대해 말을 옮긴다.
침입자가 방 안에 들어와 손가락을 잘라가도록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한심한 녀석. 왼손 약지를 도둑맞았으니 너는 겁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작자를 찾아내 시집이나 가거라. 예쁘장한 것 말고는 재주도 없는 기생오라비야. 너는 닌자 실격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세토우치 지로는 기억한다. 잠결에 느낀 날붙이의 서늘한 촉감과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야 뒤늦게 깨어 질렀던 비명과 이불을 적시던 피와 영영 사라진 밤손님과 그 그림자가 사라진 후 조롱이라도 하듯 산산이 흩어져 있던 지로의 잘린 머리카락. 그리고 결국 세토우치 저택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서도 찾지 못한 손가락. 그 사건은 지로의 명예를 영원히 추락시켰고 그것은 지로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로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기도 했다. 이전과 같이 살아가는 지로에게 사람들은 종종 복수를 종용했지만 어쩐지 지로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한 마디가 채 남지 않은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지로는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다만 내게는 촌극이 필요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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